문자를 넘은 예술,
예술을 흔드는 문자

 
임나래
(세계문자심포지아 2016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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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자심포지아 2016 행랑’은 집안과 집 밖의 경계에 위치해 집 안팎을 이어주는 열린 공간이자 다양한 주체와 문화를 받아들이는 경계지역인 행랑에 주목했다. 집의 구조상 안채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행랑채는 안채에 딸린 방, 곁채, 가장자리에 해당한다. 이러한 행랑채는 하인과 나그네가 기거하는 살림방, 또는 마구간이나 창고이면서 조선 시대에는 점포가 되기도 하였다. 행랑은 주인이 소유하였지만 점유하지는 않은 곳, 그래서 되려 일상의 다양한 쓸모를 담당할 수 있었던 공간이다.
 
지난 4월에 열린 1차 워크숍을 시작으로 약 6개월 걸쳐 전개된 ‘세계문자심포지아 2016 행랑’은 언어 체계 안에서 기록과 전달의 기능을 담당하는 기호라는 점에서 안채로 기능하는 문자를 중점에 두면서, 동시에 그 안채가 모두 담아낼 수 없어 행랑채로 나와 문자가 벌이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여정이었다. 문자가 문명사의 수많은 길목을 드나들며 형성되고 발전해온 만큼, 문자는 사용자의 삶에 밀착한 언어문자생태계를 반영하는 시대와 공간의 표지(標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행랑길을 따라 쉼 없이 움직이는 문자를 경유해 ‘지금 여기’를 사유하는 것은 곧 이 시대의 문화 다양성과 확장성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일이 된다.
 
한편 예술은 문자에 달라붙지 못한 말, 사유, 지식의 부스러기들을 담는 행랑이 된다. 일반적 의미의 문자가 표현과 소통 면에서 닫힌 구조의 언어라면, 예술은 세계문자심포지아가 지칭하는 확장된 의미의 문자가 가진 가능성을 찾아내는 열린 구조의 언어이다. 이것을 근래에 한창 회자되는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담론으로 변주한다면, 예술이란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빈 곳, 언어의 “거주지이자 피난처”가 되는 공간에서 작동하는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아감벤은 ‘시적인 언어’와 ‘생각하는 언어’의 분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 둘의 단순한 조합이 아닌 교차와 상호 경유를 통해서만 양자의 통일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듯, 세계문자심포지아는 문자와 문자, 문자와 예술, 과거와 현재와 미래, 상실과 흔적, 그 사이 공간을 넘나들며 ‘생각하는 언어/학문’으로 말하고 ‘시적인 언어/예술’으로 보여주는 여러 층위의 공론장을 만들고자 했다.
 
행랑을 통해 앞서 열거한 여러 지점을 논한 구체적인 과정은 서울 종로의 낙원악기상가와 익선동이라는 현실 속에서 진행되었다. 세계문자심포지아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처음에는 낙원악기상가와 익선동을 낯설어하는 이방인이었다가, 차츰 이 일대를 유랑하는 나그네가 되더니, 이내 낙원악기상가와 익선동의 사람을 읽고 기억을 되살려 작품에 저장하는 느슨한 의미의 아키비스트(archivist)가 되었다. 약 스무 팀이 보여준 작품이 저마다 문자와 행랑을 달리 해석했지만, 해석의 바탕에 흐르는 작업 방향에 따라 거칠게나마 묶어 소개할 수 있겠다.
먼저 김양프로젝트의 ‹worldscript.org›, 배인숙의 ‹독수리›와 ‹문자쏭›, 신효철의 ‹주고 받음›, 그리고 임선희의 ‹움직이는 익선동›은 소통의 매개체인 문자의 일차적 목적에 주목한다. 김양프로젝트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문자의 내부 구조를 분석하고, 이를 언어 분포와 연관 지어 확인할 수 있는 온라인 사이트를 구축했다. 신효철은 특정한 장소에 기입되는 흔적을 현실/가상 공간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교환하게 함으로써 현시대의 소통방식을 시각화한다. 배인숙은 문자란 특정 기호와 표기법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약속임에 초점을 두고 소리, 계이름, 악보, 타자법 등 다양한 매체를 문자 세계 안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시도했다. 임선희는 익선동 일대에 약속을 기반으로 한 의미 전달의 한 방법인 지도를 활용한다. 임선희는 익선동 지도를 새긴 의자 모양의 오브제를 익선동 곳곳에 늘어놓는데, 이로써 행인은 오브제가 놓인 한 지점과 익선동 공간 전체를 겹쳐 읽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들의 작업은 약속 혹은 법칙이라는 폐쇄성에 기반을 두고 소통 가능성을 획득하는 문자의 일차적 기능에 출발선을 두지만, 바로 그 폐쇄성에 기대어 무수한 기표를 의미 파악이 가능한 대상으로 만드는 문자의 개방성을 동시에 드러낸다.
 
가장 먼저 소개한 작업들이 문자의 폐쇄성과 개방성을 함께 다룬다면, 그러한 문자의 보편적 특성이나 정의에서 한 길 비켜섰을 때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세계를 다루는 작업들도 있다. 정승의 ‹경고된 나라에서 온 무지개›는 소리와 빛을, 이창훈의 ‹낙원›은 가요가 흘러나오는 스피커와 점자를 결합한다. 이 둘은 공통으로 통상 글자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기호를 마치 글자처럼 사용하는데, 이러한 역설적인 표현방식으로 현실과 이상향의 배반적 순간을 제시한다. 김박프로젝트의 ‹악필 프로젝트›는 악필의 규정을 뒤집어 생각함으로써 형태의 심미성에 따른 가치 판단이 아닌 육필의 진정성이 내포하는 의미를 전한다. 서로 다른 두 문자 체계의 법칙을 흔들어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이광기의 ‹광기문자 출력센터›와 글쓰기와 읽기의 금기를 다루는 흑산의 ‹무엇이든지 어디서나 누구든지 읽을 권리가 있다›는 우리가 지금껏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들의 견고한 경계를 넘어섰을 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을 체험하게 한다. 권두영의 ‹이상한 익선동›은 익선동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에 시인 이상의 문체를 빌린 비물리적인 언어가 조응하여 구축한 시적 세계를 펼쳐 보인다. 권두영은 자신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해 시를 생성한다. 이 작업의 특이점은 그것이 구축한 결과물이 완전한 어느 한쪽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온전히 소프트웨어의 개발자인 작가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를 모니터에 출력해낸 프로그램의 것도 아니다. 분명 인간이 사용하는 문자로 쓰였지만, 그것을 어떤 종류의 문학 장르라 이를 수 있을지 단언하기도 어렵다. 정승에서 권두영에 이르는 작업은 창작자가 문자의 정합성을 떠나 유연한 예술의 행랑에 들어서려는 실험으로, 감상자 또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예술 실험에 적극적으로 개입시킨다는 점이 흥미롭다.
 
세계문자심포지아의 현장은 낙원악기상가의 외부와 지하에서 4층에 이르는 내부 공간, 낙원악기상가에서 익선동으로 향하는 골목과 그 길의 상점들, 익선동의 주택과 상업공간을 비롯해 무어라 지칭하기 곤란한 사잇길을 아우른다. 그런 탓에 각기 다른 자리들이 품고 있는 기억에 집중한 작업이 또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송주원의 ‹풍정.각(風情.刻)-세운상가에서 낙원삘딍으로›는 근 50년의 세월을 간직한 세운상가와 낙원삘딍에 축적된 이야기를 현대무용 영상으로 풀어낸다. 오민정 · 임선희의 ‹진옥과 병운의 사랑 이야기›는 1920년대 낙원동과 익선동을 유희했던 예인들의 낭만과 비애를 복합적인 미디어 작업으로 조명한다. 정정호는 익선동을 여러 욕망과 필요가 쌓이고 얽힌 곳으로 이해하고, ‹허물어진 말들›이라 명명한 사진 설치로 익선동의 복잡함 그 이면에 상흔처럼 자리한 공허함에 접근한다. 익선동을 거닐자면 자연스레 눈에 들어오는 상호를 선문답과 같은 사유로 치환해 증강현실 화면으로 제시하는 이원호의 ‹익선문답›은 익선동 지역의 빠른 상업화를 에둘러 드러낸다. 팀으로 참여한 일상의 실천은 종로에서 태어난 김수영의 시 구절인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를 파이프 조형물로 변환해 익선동의 게스트 하우스 마당에 설치한다. 말은 발화의 순간에 사라지고 글은 읽힌 후에 머릿속에서 퇴색된다. 그러나 말과 글이 시각적 구조화의 과정을 거쳐 정서를 전달되면, 이것은 좀 더 직접적으로 읽는/보는 자에게 다가가 긴 울림을 남긴다.
특정한 공간 안에서 언제인지도 모르게 잃어버렸던 이야기를 불러내는 일, 그리고 느릿하게진행되는 지금의 변화를 짚어보는 일은 그 시간과 공간에 균열을 내는 행위이다. 미세한 틈에 사이에 버려져 있던 것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그 틈을 벌려야만 하고, 마침내는 그 틈이 갈라져 숨길 수 없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들이 드러낸 시공간의 히아투스(hiatus)는 때로는 저 밑에 묻어두었던 불편함과 상실감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 묻혀 있던 것, 숨기어 있던 것을 밝히는 일은 그것의 외연을 확장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탐색의 장을 여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에 소개할 작품들이 그렇다. 한재준은 훈민정음에 녹아 있는 디자인의 핵심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3차원의 한글 글자조각으로 구현한 ‹이기불이(理旣不二)› 연작을 선보인다. 한재준의 글자조각은 한글의 조형적∙디자인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무한 확장하여 한글의 조형예술적 면모를 탐색한다. 신정아와 김준호는 한재준의 글자조각이 가진 미덕을 익선동의 골목 여행기 ‹익선사용설명서›와 ‹익선, 시: 행여 익선에 오시려거든›로 풀어낸다. 윤형민의 ‹글쓰기의 제스처(When you realize there is nothing lacking the whole world belongs to you)›는 손짓으로 형상화한 알파벳을 조합해 한 줄의 문장을 만들고 이를 출력해 담벼락에 붙이는 작업이다. 작가는 분명 읽을 수 있는 문장을 만든다. 그러나 금세 파악되지는 않는 제스처-알파벳과 작가가 끝내 밝히지 않는 문장의 출처 때문에 관람자는 확정되지 못하고 부유하는 의미의 영역으로 내몰린다. 신효철은 한글의 자모 낱자와 조화, 조명을 덧붙여 샹들리에 ‹플라시보›를 만든다. 뮌과 문정주는 스탬프 찍기 놀이를 닮은 관객참여형 작업 ‹퍼블릭되기›를 통해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 사회 구조, 문자와 언어, 익선동에 관해 돌아보게 한다. 신효철과 뮌 · 문정주의 작업은 다소 유희적인 전략을 취해 문자와 언어를 다루는데, 이로써 작품이 놓인 공간에서 문자와 언어가 작동하는 기제를 탐구한다. 이른바 재발견 내지는 재해석을 통한 다른 의미 찾기라 할 수 있을 마지막 군의 작업들은 문자의 풍부한 매력을 짐작게 한다. 마치 필요에 따라 보태지고 변모하는 행랑채의 칸들처럼 말이다.
 
참여 작가들의 작품이 세계문자심포지아를 찾아온 이들에게 색다른 문자 이야기를 두둑이 들려주기는 했지만, 세계문자심포지아가 낙원악기상가와 익선동 안으로 몇 걸음 더 들어간 동네 축제로 완성되는 데에 학술 컨퍼런스, 워크숍, 퍼포먼스, 관객참여 프로그램 등이 담당한 몫 역시 매우 중요했다. 도록의 후반부에 따로 소개한 학술 컨퍼런스는 ‘문자의 행랑, 행랑의 문자’를 기조로 삼아 다방면의 인문사회학자들이 문자생태계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인 열린 장이었다. 이 열린 공간은 일률적인 틀을 따르는 여타 학술행사의 형식을 탈피하고자 했다. 학자와 예술가가 만나고 전문가와 비전문가가 손을 잡음으로써 그 자체로 문자의 보이(지 않)는 경계를 차츰 넓혀가는 통섭의 자리가 되었다. 또한 익선동의 길 위에서 행해진 김박프로젝트의 라이브 실크 스크리닝 퍼포먼스, 비라틴계 언어의 글꼴을 활용한 그란샨 워크숍, 세계다문화박물관에서 진행한 ‘세계문자로 동화 읽기’, 대형 문자 조각 ‹ㄴ.ㅁ.ㅇ›을 이용해 몸으로 한글 낱말 만들기 놀이 등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로 세계문자심포지아에 개방성과 생동감을 더해주었다. 축제 현장 곳곳에서 자유로운 형식으로 펼쳐진 프로그램들이 세계문자심포지아를 단지 ‘보고 떠나는 문화예술행사’가 아닌 ‘경험하고 즐기는 인문예술축제’로 더 단단히 자리 잡을 수 있게 해주었다.
 
“나는 항상 글쓰기와의 만남에 늦게 도착한다”는 아비탈 로넬(Avital Ronell) 말처럼 언어는, 문자는, 그리고 그 둘을 사용한 시도는 늘 무용하며 언제나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이 문자의 곁에서 유연하게 흘러갈 때 실패의 순간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연결되는 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세계문자심포지아 2016 행랑’이 다양한 층위에서 문자, 학문, 문화, 예술, 삶이 맞닿는 무수한 길을 회복시키고 새로운 차원으로 향하는 활로를 보여주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