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행랑

 
김지연
(세계문자심포지아 2016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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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지구가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달리, 같은 질량을 가진 같은 물질로 채워져 구별 가능한 물리적 특성을 상실한다면, 그런 지구에서는 어디가 중심이고 어디가 주변인지 말할 수 있는 기준이 사라진다. 모든 지점의 밀도가 같고, 모든 방향으로 같은 공간에서 방향성이란 성립할 수 없다. 그곳에서는 모든 지점이 중심이기도 하고 가장자리이기도 하다. 관측자의 위치와 무관하게 어느 곳에서 보든, 어느 방향으로 보든 같다. 그곳에서 ‘다름’은 없거나, 무의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일단 우리는 ‘불균일한’ 지구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이곳에는 ‘다름’과 ‘방향’과 ‘중심’이 있다.
 
ㅇㅅㅇ
인생이 다른 곳에 있다고 여기는 자가 있다면, 그는 행복할까. 지금 여기에서 살지만, 다른 곳을 바라보는 일은 일상에 활기를 불어 넣어줄까. 습관처럼 일탈을 꿈꾸지만, 현실이 흔들리기를 원하지 않는 이들에게 축제란 효율성이 높은 ‘외부’일 것 같다. 그러니까 모름지기 축제라면, 목적이 있는 일상의 규칙적인 노동과 걱정에서 해방되어 홀가분한 기분을 누리고 싶은 이들, 방랑자가 되고 싶지만 거주자 정체성을 포기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해 한시적이나마 ‘일탈의 계기’ 정도는 제공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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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는 발화의 흔적을 기록해 왔는데, 기호에 기억을 위탁하는 변화가 시작되던 시점, 이 문제에 대하여 깨알 같은 염려의 말을 남긴 사람들이 있었다. “문자로 인해 인간의 기억력은 감퇴할 것이다. 단지 침묵하는 텍스트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직접 대화로 전달될 때 지녔던 문답을 통해 의미를 해명할 기회를 청자/독자들로부터 박탈할 것이다. 구어적 대화와는 달리 의도적으로 선별된 수용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그 문자를 쓴 저자가 의도하지 않았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회자할 수 있으며, 문자를 쓴 저자가 문자와 함께 존재하지 않으니 저자는 자신의 전 개성을 다해 자신이 쓴 글에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ㅠ_ㅠ
우리의 현실인 인터넷 환경에 대해서 우려의 말이 떠돈다. “인터넷이 제공하는 정보의 평등은 사고의 다양성을 파괴하지 않겠느냐. 기억을 아웃소싱하는 인터넷 세상에서 인간에게 기억술은 필요 없다. 기억이 아니라 기억의 지표를 잘 기록하여 필요한 정보를 걸러내는 능력만 있으면 된다. 진지한 사고는 방해받는다. 현실의 입체 공간이 인터넷의 평면 화면에 빨려 들어간다. 실제 경험은 멸종할 것이다. 전자적 내파가 불안의 시대를 불러온다. 인터넷은 인류를 감금하고 통제한다.”
 
=ㅁ=
문자와 책이라는 미디어를 기초로 형성된 ‘선형적, 진보적, 역사적 사고방식’은 새로운 디지털 코드에 입각해서는 ‘비선형적, 순환적, 탈역사적 사고방식’으로 이행하는 중이라는데, 이미지의 시대, 상형문자의 시대, 역사가 사라진 망각의 시대라는 현재, 그 현실의 지평을 바라보고 있던 기획단은 ‘제3회 세계문자심포지아’에서 문자를 매개로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했다. 1회는 전 지구적 문자 생태계의 현주소를 총체적으로 진단하는 성격의 축제였고, 2회는 골목길을 ‘대로’가 상징하는 주류문자의 대척점에 있는 소수문자의 상징으로 끌어들여 문자의 의미와 위상을 성찰하고 체험하는 자리였다.
 
+_+
3회 축제 테마로 ‘문자와 경계’를 선택했다. 유럽 경계어의 생존전략과 그 현실을 살펴보자는 취지를 담았다. 경계어가 살아남는데 문화예술이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리서치 결과를 가지고, 이 시대에 ‘주변 문자’, ‘경계 문자’가 경쟁 속에 생존하기 위해 유용한 조건을 점검해보는 시도였다. 의미 있었다. 다만, ‘경계’라는 단어는 직접적이어서 작가들이 이 의미에 집중하여 작업을 풀어가는 일, 특히 경계어를 다루는 일은 난도가 높다는 것이 문제였다. 논의가 진행되면서 ‘경계’는 ‘지리적 경계’를 넘어서 문자와 연결하여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여러 ‘경계’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경계’는 다양성, 매개, 확장, 미래까지 뻗어 나갔다. 학술프로그램이 이 내용을 구체적으로 소화했고 이 테마와 연결고리를 가진 작가들이 학술프로그램에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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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프로그램과 학술프로그램이 조응하는 것은 심포지아의 중요한 지향점 가운데 하나였다. 3회 축제를 준비하는 내내 기획단은 이 미션을 놓지 않기 위해 애썼다. 둘의 만남을 위해 준비 기간 동안 워크숍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예술가와 학자 사이 존재하는 틈을 확인했지만, 양쪽 모두 가능한 방법을 찾아 할 수 있는 것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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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 안에서 ‘문자’는 추상화되었다. 여전히, ‘경계’는 조금 더 흐트러질 필요가 있었다. 경계의 개념을 담고 있으면서 조금 더 자유로운 상상과 표현을 허락하는 단어로 ‘행랑’을 선택하여 ‘경계’가 있었던 자리에 놓았다. ‘행랑’의 사전적 의미는 명료하다. “주택의 바깥 부분에 해당하는 주거 공간. 대문간에 붙어 있는 방을 뜻하는 행랑은 마구간, 하인들이 기거하는 방, 광 등으로 되어 있고 주택의 경계선에 따라 세워지는 경우가 많다. 주택은 물론 조선 시대의 궁전이나 관아 건축에도 일반적으로 지어졌으며, 주로 심부름하는 사람들이 기거하거나 각종 창고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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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랑’은 ‘통로’, ‘중간지대’, ‘매개’, ‘경계’, ‘차이’, ‘일탈’, ‘박탈’, ‘기억’, ‘망각’, ‘흔적’, ‘부유’, ‘소멸’, ‘상실’, ‘소수성’, ‘비주류’, ‘계급’, ‘가장자리’, ‘약한 고리’, ‘불확실함’ 등 행랑의 사전적 의미를 확장, 왜곡, 오독, 전유한 개념을 포괄했다. 출품작들을 다음과 같은 소주제로 분류했다.

행랑: 열고닫는(매개)
— 개방적인 동시에 폐쇄적인 문자의 세계. 소통의 매개체인 문자 탐색
 
행랑: 빗겨나는(실험)
— 문자가 버린 것들. 문자에서 벗어났을 때 볼 수 있는 세계
 
행랑: 사라지는(기억)
— 시간의 흐름 속에 소멸한 것들.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린 것들
 
행랑: 발견하는(확장)
— 숨겨진 의미를 찾고 정보를 탐색. 문자의 확장 가능성
 
ㅁㅠㅁ
축제의 무대는 종로구 익선동과 낙원상가로 정했다. 서울의 도심에 자리 잡고 있지만, 중심에서 벗어난 인생을 포용하는 종로3가. 이 장소의 정서는 다양한 문자 간 상생을 바라는 세계문자연구소의 지향과 닮아 있었다. 이곳에는 2회부터 관심을 기울인 ‘골목’도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형 한옥단지 익선동이 수평적 골목이라면, 세계최대규모의 악기상가이자, 한국의 1세대 주상복합건물인 낙원상가는 수직적 골목이었다. 축적된 기억과 사연이 묵직한 이 ‘골목’은 ‘소수문자’가 함의하는 가장자리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이 오래된 장소 자체가 기억-저장-호출-장치로서의 문자가 되었고, 참가자들은 휴먼 스케일이 아직 남아 있는 골목을 소요하며 ‘행랑’을 발견했다. 서울의 여느 지역과 분명히 구별되는, 비균질적 특색이 존재하는 이곳을 기획단은 서울의 ‘행랑’ 같은 곳이라고 불렀다.
 
°=°
한국 최초 근대 부동산 개발업자로 건양사를 설립해 운영한 정세권은 현재 익선동의 틀을 만든 인물이다. 조선물산장려회와 조선어학회의 재정적 후원자이기도 했던 그는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던 1910년 후반 서울에서 도시형 소규모 주택 사업에 뛰어들었다. 큰 대지를 매입하고 분할한 후 한옥 지구를 건설해 분양했다. 그가 보급한 한옥은 한옥과 양옥의 중간 형태로 20세기형 생활 방식을 고려한 도시형 한옥이었다. 초가집이 보편적이던 당시 서민의 주거 수준을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중산층 이하 서민을 위한 주택 건설에 집중했다. 개량형 한옥설계와 더불어 다양한 금융 보조 방법을 모색하여 저소득자도 주택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익선동은 서민을 위한 한옥 단지였던 만큼 서민의 생활 양식이 배어 있는 마을이 되었다. 누동궁(익선동 166번지, 철종의 사친 전계대원군의 사당)과 돈녕부(익선동 155번지, 종친부에 속하지 않은 종친과 외척을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가 있었던 익선동은 근대기에는 독립운동의 중심지였고,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살던 예술의 중심지였다. 전쟁 후 유흥가, 고급 요정 밀집지역으로 바뀌고, 다시 세월이 흘러 동네가 쇠락해가면서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고려시대부터 있던 천년 된 길이 여전히 남아 있는 이곳에서 한옥은 말 그대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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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수의 토박이가 떠난 익선동에 젊은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한 지는 몇 해 되지 않았다. 익선동이 일상의 공간이었던 이들에게 그곳은 지독하게 낡은 동네일 뿐이었다. 낡은 것의 가치를 알아본 젊은 사장들은 개보수에 착수했다. 그들은 동네의 정취를 해치지 않는 선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골목에 새로운 에너지가 차오르면서 분위기는 급속도로 변했다. 주거용 한옥은 거의 사라지고 상업 공간이 늘어났다.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최적화된 규모의 골목길은 대문 앞에 나와 얼굴을 맞대고 일상을 나누는 주민보다는 새로 뜨는 동네에 대한 호기심으로 찾아든 방문자로 채워졌다. 자동차 위주로 재편된 도로, 수직구조의 아파트에 익숙한 세대에게 ㄱ,ㄷ,ㅁ자의 한옥이 골목길에 줄지어 있는 익선동 풍경은 낯설지만, 흥미로웠다. 기성세대는 근대의 분위기가 아직 남아 있는 익선동에서 향수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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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선동의 변화는 한 주 앞을 내다볼 수 없었다. 갑자기 빈 집이 나왔고, 갑자기 빈 집이 공사에 들어갔다. 작품을 설치하고, 행사를 운영할 장소를 섭외하는데 예상보다 시간이 걸렸다.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익선동 주민을 비롯하여 도시 개발 전문가, 한옥 전문가, 서울시 관계자 등이 참여해 익선동의 발전 방향을 공유하는 익선포럼 구성원들의 도움으로 최적의 공간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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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상가는 서울시 도심부 재개발 사업의 하나로 1969년 건설되었는데, 당시로써는 보기 드문 주상복합상가 건물이었다. 종로, 명동, 광화문 일대가 서울 문화의 중심지였던 70년대 중반, 탑골공원 담장정비사업으로 그 일대 피아노 상점들이 낙원상가에 입주하면서 낙원상가는 악기전문상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록의 열풍에 악기 수요가 늘어나면서 상가 내 악기매장은 계속 늘었다. 현재는 300여 업체가 영업 중이다. 낙원상가는 서점, 한복집, 미장원, 이발소, 전당포, 볼링장, 카바레, 극장도 갖춘 복합문화공간이었다. 지금도 낙원지하상가에는 음식점 뿐 아니라 미장원, 재봉집이 있고, 4층에는 극장이 있다. 당시 낙원상가 2층은 음악인들의 인력시장으로 유명했다. 음악인들은 낙원상가에 모여 정보를 교류하고 멤버를 구했다. 80년대 초 통행금지가 해제되면서 밴드가 필요한 무대가 늘어났고, 이에 발맞춰 악사와 악기 수요가 증가했다. 낙원상가는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 심야 영업시간이 단축되고 유흥업소 단속이 시작되면서 악사 인력시장은 위축되었다. 90년대 후반에는 외환 위기와 노래방 기계의 보급으로 낙원상가에서 악사 인력시장은 자취를 감추었다. 굴곡은 있었지만, 낙원상가는 음악인들에게 아지트로 명성을 이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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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개발 초기 도심지 개발을 상징하는 역사성, 악기전문상가라는 특화된 성격은 낙원상가에 사회 문화적 가치를 부여했지만, 여전히 낙후된 이미지를 떨쳐버리지는 못하고 있다. 열악한 보행 환경 때문에 필로티로 구축된 낙원상가 저층부는 안국동과 익선동을 단절시키는 투명한 장벽 같았다. 문자의 역할이 소통인바, 작가들은 과거의 향수에 젖어있는 낙원상가에서 단절을 뛰어넘어 흐름을 유도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몸짓’, ‘소리’, ‘빛’ 같은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문자’로 호명하여, 낙원상가의 행랑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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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공간과 교감하는 예술프로젝트라는 형식은 문화계에서 이미 일반화되어 있었지만, 방법론이 익숙하다고 해서 낯선 생활공간과 마주하는 일이 수월한 것은 아니었다. 작가들은 꽤 많은 미션-환경에 반응해야 했고, 그 가운데 문자를 놓아야 했고, 행랑을 고민해야 했고, 대중의 관심을 고려해야 했다-을 수행해야 했다. 정형화된 강당을 벗어나 익선동의 술집, 게스트하우스, 낙원상가 야외 옥상, 식당 등에서 진행한 학술 행사는, 장소의 변화가 경험의 공기를 바꾼다는 것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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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용량의 제한에서 자유로워진 세상은 앞으로 디지털 환경 안에 거의 무한에 가깝게 정보를 축적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앞으로는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정보에 접속하여 이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검색의 욕망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했다. 문제는 이 욕망을 계속 유지시키는 일이라고 했다.
 
XㅛX
시대의 서로 다른 기억을 축적하고 있던 물리적 공간은 개발 논리와 서로 다른 이해관계 속에서 균질화 단계를 거쳐 평평해지고 있다. ‘다름’이 ‘같음’, ‘유사함’으로 재편되는 과정은 어떤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추진된다. 불편하거나, 심지어 두려울 정도로 낯선 요소는 제거하고, ‘색다름’을 입히는 방식으로 지구는 바뀌고 있다. 통제 가능한 익숙한 코드를 배치하여, 약간 색다르지만 결정적으로는 다르지 않은 정도의 ‘다름’이 있는 곳으로 만든다. 여기서 ‘다름’에 대한 공포는 사라진다. 사람들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조금은 색다름’을 경험해보고 싶어 한다. 매우 비균질적인 공간을 생존의 터전으로 가지고 있는 이들은 그들의 공간이 ‘색다름’의 카테고리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개조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 공간을 생활권으로 여기지 않는 이들이 부담 없이 방문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이런 욕망은 균질화를 가속시키는 동력이 된다. ‘색다름’의 매뉴얼은 그렇게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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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심포지아에서 문자가 사라졌다는 후일담이 있었다. 문자가 사라졌다기보다 문자의 개념이 논쟁 가능한 지점까지 확장된 것이다. 유의미한 기억수단, 소통수단으로 생존하기 위해 문자는 스스로 그 모든 경계를 더 넓혀갈 것 같다. 그 일은 어쩌면 문자가 문자인 이유를 상실할 때까지 이어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