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뼈

 
임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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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뼈는 침묵.
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뼈, 말의 뼈. 뼈있는 말입니다. 심폐기능 정지, 어느 사망진단서입니다. 물대포를 맞고 314일 동안 고통과 싸우던 백남기 선생이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사망진단서-심장박동 정지, 폐기능 정지. 숨을 못 쉬고 심장이 멎어서 죽었다. 숨을 쉬고 심장이 박동하는데도 죽는 사람이 있습니까?
2009년 10월 10일,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취임한 지 10일밖에 되지 않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발표했습니다. 세계의 비난 물결이 일자 “오바마가 재임하면서 세계평화를 위해 일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우리가 기대하는 바가 크고, 그를 격려해주기 위한 차원에서 수여했다”고 했습니다.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8년 임기를 거의 마친 오바마가 세계평화를 위해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나라를 봅시다. 천안함 사건. 말을 막았죠? BBK, 자원외교, 4대강 사업, 그리고 세월호, 개성공단 폐쇄, 역사 국정교과서, 건국절, 위안부 협상, 비정규직. 또 우병우, 김형준, 김재수, 미르, K sports 재단, 사드, 백남기 선생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말! 말! 말!
썩어 문드러진 말. 뼈 없는 말들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말. 말이 아닌 말. 뼈가 없어 흐물흐물한 말. 거짓, 핑계, 사기, 기만, 내숭, 변명, 공갈, 협박, 급기야는 폭력. 우리는 이런 말들을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말에 힘을 넣어줘야 할 것입니다. 말을 불러일으켜 세워야 할 것입니다. 즉, 말, 말에 뼈를 박아야 합니다.
 
말의 뼈. 그것은 침묵입니다, 침묵. 침묵은 뭡니까? 침묵은 말의 반대, 부정, 거부. 침묵은 입 닫기, 입 닥침. 그런데 어떻게 말의 뼈가 침묵일 수 있습니까? 침묵하는 동안 우리의 생각은 멈추지 않습니다. 생각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침묵이 계속된다면 그게 뭡니까? 아무것도 아니죠. 죽음. 죽음 그 자체, 저 절멸, 적멸의 세계. 그렇기 때문에 침묵은 시간 속에 존재합니다. 침묵은 시간 속의 존재. 침묵은 잠깐 말 멈춤, 휴지입니다. 말의 휴지, 말의 휴전, 말을 끊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되뇌고 다시 생각하고 상대도 쳐다보고 껴안고, 자기와 진정으로 만나는 자기와의 대화, 세상을 보듬고 배려하는 것.
말 없음이 말 있음을 압도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침묵입니다.
 
침묵이 시간을 벗어나서 적멸의 세계로 빠져버리면 세상이 끝나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말은 시간에 갇히지만, 침묵은 시간을 초월합니다. 하여 침묵은 순간이지만 영원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의 뼈는 침묵이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자, 그런데 침묵의 뼈는 무엇일까요? 여러분, 침묵에도 뼈가 있을까요? 침묵의 뼈?
침묵의 뼈는 문자입니다. 비약이라고요?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을 하죠? 우리가 침묵하는 속에서도 생각은 계속되죠? 그런데 만약 그 침묵이 말로 된다고 할 경우에는 그건 이미 침묵이 아니고 만약 침묵이 침묵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듯이 그렇다면 말은 무엇으로, 어떤 몸으로 나타납니까? 결국, 저는 문자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침묵의 뼈는 문자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의 소리는 말, 시니피앙–기표. 생각의 기록은 문자입니다. 시니피에–기의. 말은 침묵 없는 생각. 문자는 침묵의 말. 침묵을 깨우는 것, 침묵의 몸이 문자입니다. 문자는 생각의 집, 생각의 결구, 구조, 조직, 구성, 기둥, 뼈입니다. 사람마다 뼈가 다릅니다. 하물며 국가, 민족, 종족, 문화가 어찌 뼈가 같겠습니까. 각자의 뼈를 존중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 세계문자심포지아가 지향하고 바라는 세상입니다. 
 
마치 연어가 물살을 거슬러 폭포를 차고 뛰어오르듯 우리는 시공을 초월해서, 문자의 침묵인 말을 찾아서 여행을, 모험을 감행해야 합니다. 문자는 삶의 기록이고 생활의 기록입니다, 너와 나의 기록. 즉, 삶의 뼈, 생활의 뼈, 진정한 너와 나의 뼈.
세상의 뼈를 찾아나서는 도정은, 문자의 최초, 최후를 찾는 도정입니다. 세계문자심포지아는 바로 이 문자 찾기의 도정에, 이 기쁨에, 이 아름다움에 우리의 미래를 걸고 있습니다.
문자의 몸을 찾아서 줍고, 모으고, 섞고, 털고, 깎고, 붙이고, 갈고, 덮고, 빼는 마침내 일 획에 이르는 일입니다. 
일획.
문자의 일획은 문자 이전 이후를 증명하고 증거합니다. 감히 말씀드립니다. 태초에 일획이 있었습니다. 태후에 일획이 있습니다.
문명은, 문화는, 세계는, 일획으로 남습니다.
 
일획!
 
감사합니다.